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재빠르게 작업을 마친 나는, 문을 꼭꼭 닫는 것을 잊지 않고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찻잔 준비 했고, 책도 있고, 정원으로 통하는 문도 조금 열어두었고. 매일 꿈 꾸어왔던 이상향의 준비는 이것으로 모두 끝!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헤헤헷.”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다. 다소 지나치게 들떴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처음, 미츠타다상이 마시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부터 몰래 간직하던 소망이었으니까. 심지어 한 번 실패로 돌아간 뒤에, 원천봉쇄까지 당해서 영원히 이룰 수 없을거라 생각하던 일이었다.
“하치스카상도 참. 한 모금은 괜찮을 텐데.”
커피를 마시고 있던 미츠타다상이 허락해준 일이다. 심지어 누구보다 가장 반대할 것 같은 카센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만 문제는 그 자리에 하치스카상이 있었다는 것뿐. 미츠타다상에게 잔을 받아들기도 전에, 하치스카상은 절대 안 된다고 단호하게 손을 가로막았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할 거라는 주장이 주로, 주변 이들에게까지 강조하는 바람에 결국 몰래몰래 넘보던 맛보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모두가 커피를 마실 동안 따뜻한 우유나 들고 있어야 했고. 우유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척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때부터 계속 틈을 노리고 있었다. 우리 혼마루는, 다 같이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어찌되었던 오늘로 성공이니까 문제없다. 우연이 가져다 준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기로 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곁눈질로 본대로 블랙커피를 만들어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우아한 등을 떠올리며 나는 양 손으로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올렸다. 수상한 검은색 액체가 찰랑이며 뭔가 씁쓸한 어른의 향이 모락모락 김을 타고 올라왔다. 미츠타다상이 마시는 것을 볼 때도 그랬지만, 새까만 색이며 뭔가 향긋한 향이며 어른의 음료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시간은 넉넉했기에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호호 입김으로 식힌다. 천천히 음미해도, 설거지까지 마치면 제 아무리 미츠타다상이라도 모를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럼, 일단 한 모금부터...”
제일 궁금한 게 맛이니까, 적당히 식었다 싶었을 때 나는 찻잔을 기울였다.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액체가 입술에 제일 먼저 와 닿고, 부드럽게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혓바닥에 닿는 순간-
“?!?”
이, 이거 무슨 맛이야?!
씁쓸하다. 쓰다. 고통스럽다. 맛없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어른의 음료라 어느 정도의 생경함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건 처음 느끼는 맛 정도가 아니었다. 솔직히 왜 마시는지조차 의심될 정도의 괴상한 맛이다. 솔직히 지금 즉시, 입안에 든 것을 뱉어내고 싶을 정도지만. 그건 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음식물을 입에 한 번 담았다가 내뱉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있는 힘껏, 나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그렇지만 목 뒤로 넘기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린다.
콜록 콜록
가득 담긴 그것들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 숨이 막혀왔기 때문이다. 간신히 흘리지는 않았으나 한참을 삼키고 나서 기침을 해야 했다. 억지로 삼키다보니 목에 쓰라리다. 가슴이 먹먹하게 아팠다. 생리적으로 아른거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면서 나는 찻잔을 노려보았다.
“... 이거, 뭐야...”
하치스카상이 괜히 금지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츠타다상은 어떻게 이런 이상한 것을 그렇게 휙휙 마실 수 있는 거지? 자신이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미츠타다상의 미각이 이상한 것인가. 나쁜 생각임은 알지만,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블랙 커피는 이상한 맛이었다. 아마 앞으로 그들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이전처럼 멋지다고 바라보지는 못할 것 같다.
“... 진짜로, 맛없어.”
그러고 보니, 뭔가 수상하다. 새까만 색이 꼭 먹지 못하는 음식임을 말해주는 것 같은걸. 독특하지만 나름 세련되어 보이던 향도 조금 겁이 나서 나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물려보았다. 반절은 넘게 남은 커피가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있다. 마음 같아서는 버리고 싶지만, 음식을 버리는 것은 나쁜 일이다. 이 커피도 누군가의 힘으로 수확되어서, 많은 노력들 속에서 가공된 것 일테니까. 함부로 버리면 그런 사람들의 의지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무엇보다 우리 혼마루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나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
“... 일단, 그... 코 막아보고...”
양심과 솔직한 마음 사이에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조금 참는 것을 선택했다. 그 혓바닥이 텁텁한 맛은 무섭지만 스스로 한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코를 막으면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한 입에 마셔버리고 이와토오시상이 전에 사다주신 사탕을 먹자. 나름 그런 계획을 세워서 미리 사탕도 꺼내두었다.
꿀꺽
“가, 간다-”
각오를 다지고 찻잔을 기울임과 동시에 눈을 꼭 감았다. 혓바닥과 목에 달라붙은 질척함은 다신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지만, 나는 근성으로 꾹꾹 참았다. 그 과정 속에서 너무 서러워져 조금 울었지만 어찌되었던 사탕의 맛은 어느 정도 커피의 이상함을 중화시켜주었고, 깨끗하게 설거지도 마칠 수 있었기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내게 남은 것이라곤 어른의 음료에 대한 회의와 약간의 부작용 정도로, 한동안 밤에 잠을 자지 못해서 아침마다 누가 깨울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곤 했다.
오늘도 그 때문일 것이다. 불현 듯 잠에서 깨어나, 한참을 뒤적였지만 그럼에도 잠이 오지 않는다. 문 너머로 아직 깜깜했기에 아침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잠깐, 우유를 마시고 올까? 따끈따끈한 우유를 마시면 잠이 쉽게 온다. 이전에도 여러 번 경험해 본터라,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느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일단 살며시 문을 열어 앞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까치발로 복도를 걸어나갔다. 다들 귀가 밝은지라 조심해야 한다, 조심. 혹여 깨우기라도 한다면 미안하니까. 다행히 깊은 밤인지 아무도 만나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달했...
“어?”
“앗!”
도달 하지는 못하고 근처에서 수상한 사람과 마주쳤다. 수상한 색의 옷을 입고, 커다란 자루를 들고, 수염과 모자로 얼굴이 가려져 있지만 나는 위와 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 혼동할리 없다.
“미-”
“하하하, 들켰군. 산타란다.”
산타? 설마 내가 알려준 그 산타인가?
혼마루의 시간감각이란 살짝 옛날과 같아서 서양에서 들어온 명절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모처럼 겨울도 오고, 들떠서 나는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덕분에 오늘 하루 종일 크리스마스 준비를 했었다. 당연히 산타 이야기도 나왔는데 설마... 수상하긴 하지만 미츠타다상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덕분에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 닫아야 했다. 누가 봐도 미츠타다상인데... 미츠타다상이지만 여, 여기서는 아는 척을 하면 안 되는 건가? 아무래도 눈치가 그랬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 아, 아니... 그.. 산타, 상?”
“응응, 왜 불렀니?”
“그... 저...”
“아, 무슨 일로 온 건지 궁금한 거야? 아쉽지만 그건 비밀. 미리 알면 멋지지 않으니까 내일을 기다려주렴.”
선물, 인가. 내가 너무 앞서가는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이거 선물 아닐까? 어떻게든 힌트를 얻기 위해 흘끗흘끗 미츠타다상이 들고 있는 보따리를 훔쳐보지만 이런 어두운 곳에서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오히려 미츠타다상이 말을 붙이는 바람에 후다닥 고개를 돌려야했다.
“그보다 잠에서 깬 거니? 혼자 나왔어?”
“네? 아, 네에... 그, 잠이 안 와서 우유를 마시려고...”
“우유? 잠깐 기다려보렴.”
미츠타다상, 아니. 산타상은 보따리를 어깨에 얹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얼결에 따라 들어갔지만 등을 돌리고 산타상은 뚝딱 데운 우유를 만들어 준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잡으렴.”
“감사합니다아...”
“별 것 아닌걸. 꿀을 넣어주고 싶었지만 늦은 밤이니까 말이야. 그냥 우유로 참아줘.”
“네, 괜찮아요. 맛있게 마실게요, 미- 산타상.”
“아! 이, 이건... 나는 산타니까 말이지. 이런 것도 잘 안단다.”
“아... 그렇, 군요.”
허둥지둥 꺼내는 말은 누가 봐도 허술하게 움직였던 자신에 대한 변명이지만, 나는 차마 필사적으로 둘러대는 미츠타다상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도 연기에는 재능이 없다. 나름 시치미를 뗀다고 떼 보았는데, 미츠타다상의 말이 자꾸 길어지는 게 오해를 한 모양이다.
“산타는 말이지, 뭐든 멋있게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주인이 보-”
“저!”
“응?”
미츠타다상의 말실수에 나는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인지 미츠타다상은 멀뚱히 나를 보았지만, 할 말이 있어 부른 게 아니니까 뭔가 말 할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침묵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기에 급히 단어를 이어 붙였다.
“산타상은, 그... 뭔가 안 마시세요?”
“응, 나는 괜찮아. 그, 나, 남의 집이니까 말이지. 손님의 예의가 아니지, 하하. 그러고 보니 너를 세워두었구나, 방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가자. 여기까지 오는데 춥지 않았어?”
“춥지는 않았는데... 아, 괜찮아요. 이거 마시고 설거지도 해야하고-”
“괜찮아, 괜찮아. 설거지는 내일 해도 되니까. 그런 걸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자, 너무 오래 있으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니까. 가자.”
미츠타다상은 부드럽게 바깥으로 내 등을 밀었다. 조금 버텨봤지만 내가 미츠타다상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몇 걸음이 걷다가 포기했다. 우유를 다 마시고 다시 몰래 나오는 방법도 있지!
“아, 참. 다시 나오는 것은 금지. 마시자마자 자는 거야.”
“에에-”
“너무 늦게 자면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다고? 최근 유달리 아침에 피곤하지 아, 아니. 피곤하다고 들었어. 그... 네 남사들에게.”
미츠타다상, 그 말은 없는 편이 덜 수상할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이었지만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까 모른 척 해야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잔을 움켜쥐는 것으로 참아냈다.
“네에- 우유를 마시고 곧바로 이 닦고 잘게요.”
“착한 아이, 착한 아이.”
머리를 토닥이는 손길이 어딘가 나른해진다. 걸으면서 마신 따뜻한 우유 때문일지도 모르지. 아까 멀ᄍᅠᆼ한 걸음으로 걸어왔던 것과 달리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미츠타다상의 팔에 의지해 방 앞으로 돌아왔다. 내 방을 알리 없는 산타상은 문을 열어주고,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들어가서 주무세요.”
“하지만 이...”
“으음, 원래는 안 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는 걸로 할까? 졸리니까.”
정말 너무 졸리다. 눈꺼풀이 마구마구 내려와 제대로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게. 나는 미츠타다상이 이끌어준대로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갔다. 베개를 고쳐준 미츠타다상은 이불도 턱 끝까지 고쳐서 덮어준다.
“... 산타상... 안 주무세요?”
“일이 끝나면 잘 거니까 걱정마.”
“일?”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는 일이지.”
쪽
“좋은 꿈을 꾸렴.”
따뜻한 무언가가 이마에 닿았다가 사라진다. 정체를 알기도 전에,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끌리듯 깊은 곳으로 잠겨들었다. 모처럼 맞이하는 숙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다음날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햇볕 속에서 눈을 뜬 나는 생각했다.
“하아암-”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몽롱하면서도 주섬주섬 준비를 끝내고 방을 나섰다. 물론 어젯밤 마신 우유잔도 챙기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미츠타다상이 가져간 모양이다.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찾아보려다가 머리맡에서 수상한 보따리를 발견했다. 내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명료했다.
“일어났어?”
“미, 미츠타다상?”
“응, 난데. 무슨 문제 있어?”
“아니!”
지나치게 당황했지만 당황할 일은 아니다. 침착하게 나는 선물을 열어보았다. 내 것이 맞는지 귀여운 카드와 함께 맛있어 보이는 코코아가 들어있었다. 코코아는 둘째 치고, 문제는 카드 가장 마지막에 적혀있는 추신이다.
「ps. 무리해서 먹을 필요는 없단다.」
“이거!”
“뭐?”
뭔가 연상되는 것이 내 잘못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지만 일단 기세좋게 문을 열고 나니, 할 말이 없다. 혹시 내가 오해한거라면... 나 혼자 찔리는 것이라면 할 이야기가.. 우물쭈물하던 나는 결국 자세한 이야기를 포기하기로 하고 코코아를 내밀었다.
“자고 일어나보니 이런 게 있었어.”
어설픈 말 돌리기에도 미츠타다상은 부드럽게 웃었다.
“산타가 선물을 준 모양이네. 축하해, 주인.”
“으응... 그... 미츠타다상 고맙습니다.”
“무, 무슨 소리야. 산타에게 고마운 거겠지, 그거.”
“아, 응! 산타에게 고마워!”
“가자, 아침 밥 먹고 타줄게.”
“응.”
미츠타다상이 타 준 코코아는, 커피와 똑같이 새까만 색이었지만 무척이나 달콤했다. 즐거운 성탄절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