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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찰나, 미카즈키는 얼굴에 와 닿는 공기가 가을치고는 너무 차가워서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자신의 체온으로 데워져 안락한 이불 속에 폭 파묻혔다. 아침이지만, 방안이 어둑한 게 오늘은 날이 흐린가 싶어서 빼꼼 고개만 내밀어 창호지처럼 젖빛 유리가 끼어있는 닫혀있는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그런데 평소 혼마루에서 보지는 못했던 작은 무언가가 창문에 부딪혀 작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춥지만 않았다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봤을 테지만, 이 혼마루에 현현하고서 처음으로 겪는 싸늘함에 미카즈키의 내부에서는 잠시 동안 이대로 좀더 이불속에 틀어박혀 있을지 말지 첨예한 갈등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역시 호기심이었다. 오래된 검답게 느긋하고 태평한 성격이지만, 그가 지금 쓰고 있는 실체화된 육신은 이제 한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단순히 물건인 검이었을 때는 몰랐던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겪는 감각은 시시때때로 놀랍고,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해주었다. 늙은이지만, 아직 세상에는 자신이 몰랐던 것이 많아 하루하루가 즐겁기 그지없다. 적과 싸우는 것도, 아직은 서툰 내번 일을 하는 것 등등 몸을 가지고 직접 움직이고 보며 말을 나누는 행위 그 모든 것이.

그래서 갑작스러운 추위에 몸을 떨면서도 일어나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확, 얼음처럼 싸늘한 바깥공기가 흘러들어와 깜짝 놀랐지만, 곧 이어 창밖을 보고는 미카즈키는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냐면, 혼마루 전체가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기에.

미카즈키는 홀린 듯이 소복소복 하늘에서 내리는 함박눈에 덮힌 혼마루 정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열린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겨울의 한기에 몸이 싸늘해지는 것도 잊고서.

살아있는 생생한 육신을 가지고서 바라보는 겨울의 풍경은 검으로써 오랜 세월을 존재해 왔지만, 생동감 넘치는 충격이었다.

아직 혼마루의 다른 남사들은 잠을 청하고 있거나 갑작스러운 추위에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지 정원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어 무척이나 고요했다. 하지만, 텅 빈 적막감과는 다른 고요였다. 마치 온 세상에 깔린 눈이 번잡한 소음을 모두 덮어버린 듯이….

미카즈키가 훅 길게 입김을 불어보니 하얗게 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김과 닮았다 싶어서 미소를 머금고서 다시 길게 입김을 분다.

혼마루가 하룻밤 새에 겨울이 되어버린 것은 이제 곧 12월 말,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사니와가 일주일간 남사들에게 휴가를 선포하면서, 내친 김에 한동안 가을을 유지하고 있던 계절을 겨울로 확 바꾼 탓이었다.

미카즈키는 어린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창문을 닫고서 재빨리 밖에 나갈 채비를 한다. 추우니까 내번을 할 때 입는 회색 내복을 입고, 그 위에 바리바리 가진 옷을 껴입는 식으로. 옷을 껴입던 미카즈키는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반짝 떠올렸다.

 

‘아, 설피라고 하던가? 그런 눈신발도 있는지 모르겠군….’

 

자신의 방 벽장을 뒤져서 설피를 찾아보지만…… 사실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중에 사니와나 다른 남사들에게 부탁해서 구해야겠다고 다짐한 미카즈키는 설피가 없지만, 제 딴에는 추위에 맞서 싸울 완전무장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여 포부도 당당하게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함박눈이 내리는 온통 새하얀 혼마루의 모습은 다시 봐도 놀랍고, 아름다웠다. 그저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 건데도 가슴이 어딘지 설레어서 추위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만 보던 그는 큰맘 먹고 조심스레 그 어떤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정원에 발을 디딘다.

뽀득. 왠지 티 한 점 없이 완벽했던 하얀 종이위에 자신이 오점을 남기는 것 같아서 묘하게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이미 발자국은 찍혀버렸고 시간을 돌리지 않는 한 정원에 남겨진 발자국은 지워지지 않으리라. 미카즈키는 이미 저질러 버린 거,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금 한걸음 조심스레 눈 위에 올린다.

뽀득. 그저 눈 위를 천천히 걷고 있는 것뿐이지만, 그저 고이 보물로서 귀중히 보관되고 있었던 검으로써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감각과 경험이었다. 그래서 미카즈키는 어린아이처럼 무척 신이 났다.

단도들처럼 마구 뛰어다니지는 않고, 조용히 눈밭 위를 걸어 다니며, 정원수나 관목에 소복히 쌓인 눈을 만지작 거리는 거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추위는 몹시 달갑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은 추위조차 잊고 미카즈키는 이 혼마루에 겨울을 불러온 이를 떠올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혼마루에서 누군가 조용히 정원 쪽으로 걸어 나왔다. 익숙한 기척에 미카즈키는 뒤돌아 바라보며 만월과 같은 환한 웃음 지어준다.

 

“잘 잤느냐? 네 덕분에 아침부터 아주 근사한 걸 보게 되어서 정말 감사하구나.”

 

상대는 미카즈키보다는 머리 하나는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인간이었다. 사니와, 미카즈키의 주인이자 이 혼마루의 주인. 맑은 낮의 하늘과 같은 머리색을 한 소녀는 미카즈키에게 인사를 하려다 그의 모습을 보고 픽 웃음을 흘린다.

 

“…좋은 아침…풋… 달 영감, 꼴이 왜 그래?”

 

가지고 있는 옷이란 옷은 바리바리 껴입어서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어있지만, 미카즈키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양팔을 들어 올리며 웃으며 대꾸한다.

 

“이렇게 입으니 그리 춥지도 않고 든든하단다.”

“아이고, 하다못해 미츠타다를 깨우기라도 하지…. 겨울철 대비용 옷차림은 제대로 차려줬을 텐데….”

 

사니와는 혀를 차고는 다가와 그대로 덥썩 미카즈키의 손목을 잡고 다시 혼마루 본채 안으로 이끈다. 미카즈키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순순히 그녀를 따라 총총히 걸어간다. 사니와가 미카즈키를 데려간 곳은 사니와 본인의 방이었다. 겨울 대비를 해놓아서 난로가 틀어져 있어서 방안은 따스했다.

사니와는 자기 옷장을 뒤적거리며,

 

“제대로 겨울옷으로 갈아입혀 드릴게요.”

 

옷가지를 찾은 사니와는 뒤돌아보니 앉는다고 어기적거리는 미카즈키를 보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사니와는 낑낑거리며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남의 시중 받는 걸 좋아하고, 익숙한 옛날 귀족체질 양반이라 미카즈키는 눈을 깜빡이며 얌전히 벗겨주는 데로 가만히 있다. 사니와는 그래도 지금 그가 그 평소에는 꼴불견이었던 회색 내복을 입고 있어서 제대로 겨울옷을 입혀준다고 홀라당 벗길 필요는 없는 건 다행으로 여겼다.

사니와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고, 혼마루에 놀러 와서 누나를 돕곤 하는 일이 더러 있어서 옷가지를 좀 두고 있었다. 미카즈키가 남동생 보단 키가 살짝 크긴 하지만, 그래도 워낙에 날씬해서 어찌어찌 입을 수 있었다.

목도리에 장갑에 모자에… 미카즈키에게는 몸을 꽉 조이는 듯한 낯선 현대식 의복에 답답하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사니와는 쌈박하게 무시했다.

 

“생에 최초로 감기 걸려서 호되게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입고 있어.”

“…알겠네.”

 

지금처럼 때때로 굉장히 박력이 넘치는 사니와의 시선에 미카즈키는 답답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축적된 세월은 미카즈키가 더 길긴 하지만, 피가 흐르고 육신을 가진 생명체로써 살아온 시간은 사니와가 훨씬 더 길었다. 거기에 혼마루 관리한다고 억척스러운 면까지 생겼다. 주인으로써 부하들을 제대로 휘어잡는 능력이 있어야 당연한 법이긴 하지만… 경제적인 부분에서 절약이니 재활용이니… 서민스러운 감각을 투철히 발휘하는 모습이 귀하신 검들에게는 많이 생경하고 낯설고, 어리둥절하다. 그렇게 서로의 상식이 상충되어서 이런저런 작은 트러블도 여럿 있다.

분명 산다는 건 마냥 즐겁지도 않고,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다시금 눈이 쌓인 혼마루 정원으로 나서면서 미카즈키는 적어도 이순간은 살아있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느낀다. 그저 검이었다면 몰랐을 즐거움을 한껏 느끼고 있으니까.

미카즈키는 겨울 부츠를 신어, 아까와 달리 발끝이 훨씬 덜 시리고 옷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도 확 줄어서 보다 활기하고 즐거운 동작으로 정원을 걷는다. 그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사니와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연다.

 

“난 추운 건 싫지만, 이렇게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게 좋아.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에는 눈 내린 풍경을 유지할 거야.”

“크리스마스라… 현세에는 다양한 풍습이 생겼더구나.”

“영감은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알아?”

“바다 건너의 먼 서방의 나라에서 흘러들어 왔다는 것 외에는 잘은 모른다만, TV에서 크리스마스를 언급하면 뭔가 축제 떠들썩한 분위기가 나고, 혼마루의 다른 이들도 그러하여 나도 절로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구나.”

 

미카즈키는 물론이고, 남사들이 제대로 육신을 가지고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다들 처음이라 다들 들떠있다. 아와타구치의 단도들이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세우고 싶다며 이치고와 함께 사니와를 졸라댔고, 미츠타다와 카센은 책을 보며 크리스마스 특별요리에 대해서 공부하기도하고, 츠루마루는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분장을 할지 열을 띠고 등등…….

 

“나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무척 기대하고 있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건 처음이니까. 그러니까… 이왕이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어.”

 

사니와는 미카즈키를 향해 해바라기 꽃과 같은 미소를 지어 보낸다. 미카즈키는 저 미소를 짓는 그녀가 사랑스럽고, 정말 은인처럼 여기고 있다.

 

“그리고 아직 며칠 이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미카즈키!”

“메리 크리스마스.”

 

미카즈키는 그녀에게 답하며 그의 가슴 안쪽이 살며시 두근거리고 따스한 무언가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설레임과 기분 좋은 감각은… 이 역시 살아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런 기회를 준 사니와를 은인이라 여길 수밖에 없다. 또한 그녀를 위해서, 그녀의 검으로써 살아갈 마음을 다시금 굳힐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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